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문단 편집) ==== [[진포해전]], [[최무선]]의 신무기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진포해전)] ||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0805404_STD.jpg|width=270]][br]'''[[최무선]](崔茂宣)''' || 왜구의 끝없는 침입이 계속되던 1380년 8월, 마침내 무려 '''500여 척의 왜선'''은 진포(鎭浦) 어귀로 진입해 오기 시작했다. 이는 '''고려 말 끝없는 왜구의 침입 가운데서도 단연 역사상 최대의 규모였다'''. 30명에서 40여 명 정도의 왜구가 한 배에 타고 있었다고 가정할 시, 이는 1만여 명, 최대 2만 가량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이 압도적인 왜구는 현재의 충청남도 서천인 진포를 향해 쳐들어왔다.[* 전북 군산이라는 소수설도 있긴 하다.] 이에 맞서 싸우기 위해 고려 역시 나세, 심덕부, [[최무선]](崔茂宣)에게 '''함선 백여 척'''이라는, 대 왜구와의 전쟁에서 이전까지 고려가 동원했던 수군 중 최대 규모의 수군을 맡겨 국운을 건 혈전을 벌이게 했다. 이보다 앞서, 1380년 해도 도통사를 겸임하게 된 최영은 [[현시창]]인 나라의 상황을 설명하며 "나라에 함선이 백여 척밖에 없다." 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몇 개월 사이에 전력이 극적으로 증강이 되었을 확률은 그리 많지 않으므로 이 당시 고려군의 함선 백여 척은 '''고려의 모든 해상 전력'''이나 다름없었다. 만일 이 전력이 합포의 전투나 착량의 전투에서처럼 손도 써보지 못하고 괴멸된다면, 그 이후 최소한의 방위력마저 날아간 고려는 왜구를 막을 기력이 거의 남아나지 않았을 터였다. 왜구의 함선과 고려군의 함선은 차이는 있겠지만, 단순 숫자로는 이 진포해전 당시 양쪽의 전력은 1 대 5의 수준이었고, 이전 몇십 년의 전투에서 고려 수군은 이작도 전투 등에서 왜구에게 처참한 꼴을 당하기만 했었다. 따라서 이 싸움은 이전까지의 양상대로라면 거의 어려운 싸움이었다.[* 고려 말 ~ 조선 초에야 대마도 정벌 등으로 수시로 왜구들을 두들기기는 했지만, 조선 수군이 일본군에 크게 우위를 점했던 때는 중기 이후 [[판옥선]], [[거북선]] 등의 대형 전함 개발과 더불어 '''[[이순신]]'''이라는 걸출한 지휘관이 나왔을 때였다.] 그러나 이 사상 최대의 위기에서, 정말 기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꾸준히 [[화약]] 제조에 관심을 보이고 화포를 만든 [[최무선]](崔茂宣)에 의하여 화포가 처음으로 고려 수군의 함선에 장착되었고, '''신무기 화포의 힘을 빌려 500척의 왜구 함선을 거꾸로 박살내는 수준에 이른 것이다.''' 이는 이작도, 합포, 착량 등에서 30여 년에 걸쳐 졸전만을 거듭한 고려 수군이 드라마틱한 일대 반격을 가한 순간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